되돌아오는 서사:
도시와 몸의 기억 읽기
임나래 (미술비평)
이제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
그대는 자신의 무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그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무지라고.
의심은 믿음보다 강하고, 호기심은 박식보다 강하다.
그대를 이곳에 올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그 의심과 호기심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여행의 책
우리가 익숙한 것에 흥미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대게는 새로운 것이나 낯선 것에서 특별한 의미를 찾으려 하고 오랜 시간 곁에 있어온 것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잘 알아서 오히려 전혀 모를 수도 있다. 김혜련에게 안양이라는 도시가 그랬다. 자신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별날 것 없는 일상을 이어나가는 땅이었던 탓에 그에게 안양은 별난 것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래된 풍경에 호기심을 가지고 안양을 다시 걷기 시작하자, 익숙함의 옷이 덮고 있던 새로움에 눈을 뜨고 마을에 어려 있는 작은 위트를 발견하게 되었다. 안양을 걷기 시작한 지 삼 년 째, 이제는 혼자 걷지 않고 건축가, 조경전문가, 문화연구자, 지역 토박이 등과 함게 걷는다. 안양 만안구의 안양동, 양명고, 중앙시장 빌딩, 비산동, 박달동 등의 구석구석을 몸소 찾아 탐사했다. 그리고 삶의 엉뚱한 위트가 축적된 장면들과 그 속에 사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며 재해석인 <안양 산책> (7’13’,가변크기)을 제작했다.
<안양 산책>은 작가 자신이 항상 들고 나는 일상의 길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시간이 쌓인 골목으로 들어가 보았던 짧은 여행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그려낸 동네 여행은 아이러니하게도 동네이면서 미지의 영역이다. 바꾸어 말하면 공간적으로는 이미 채워져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기만 하고 여전히 비어 있는 영역이다. 아마도 작가 자신인 듯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걸음을 뗄 때마다 건물과 사람과 도로가 튀어 오른다. 그제야 자신이 알아내고 찾아낸 것으로 동네가 채워지고 그 풍경은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와 심상에 기입된다.
<안양 산책>의 제작 후에도 작가는 안양 탐사를 멈추지 않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육십여 차례가 넘게 지역을 다니며 재기발랄한 팝업북처럼 일상의 모서리에서 돌출하는 것들을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으로 잡아내어 작업으로 이어가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 <무인극단 워크맨>도 역시 안양이라는 도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다만 앞선 작업에서 작가가 도시 공간에 대한 관심을 횡적으로 확장해왔다면, <무인극단 워크맨>에서는 도시의 통시적 변화와 그와 함께 살아 온 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작가가 내세운 이야기의 화자는 안양 마분(현 관양동)에서 태어난 토박이 노인이다. 노인은 공원 한편에 앉아 자기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작가는 이야기의 몇 개의 결정적 순간을 골라 손그림을 그렸다.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노인의 증언 일부에 설명을 보태어 소개하자면 이렇다. 88년 안양에 대단위 주택단지 개발 계획이 발표되고 90년대 이후 아파트가 들어 대거 들어섰다. 농사를 짓고 살았던 노인은 농한기에는 걸설회사에 가서 자재 수리로 돈벌이했다. 그러나 논밭이 점차 사라지면서 주된 일자리를 잃었다. 77년 7월 8시간 동안 계속된 폭우로 안양시 일대가 침수되고 산사태가 일었다. 노인은 홍수에 떠내려온 사람과 가축을 또렷이 기억한다. 군 제대 후 길러보려 산 오리알 500개는 50개만 부화하고 말았다. 그나마도 개울가에서 노는 오리들을 뺏말 사람들이 많이들 잡아먹었더랬다. 6.25 전쟁이 발발했다. 아직 젊었던 노인도 참전해야 했다. 금화 전투에 나갔다가 무기 파편에 맞아 수도육군병원에 입원했다. 부상이 진정되면서 위생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 위안부 강제 동원이 성했다. 신부 측에서 서둘러 결혼하고 일곱의 자녀를 낳았다. 안양에는 학교가 없었던 탓에, 어린시절의 노인은 과천보통학교에 다녔다. 내 나라가 아니었기에 조선말을 쓰지 못했다. 박달동에서 일본군 훈련도 받곤했다.
노인의 이야기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삶을 구성한 요인들은 결코 사적이지 않다. 예컨대 그는 일본의 교육, 해방, 전쟁, 경부선 역사의 개통과 더불어 밀어닥친 고속 성장과 같은 시대의 부침을 받아내야만 했고 사회의 사건을 겪어 내야만 했다. 키에르케고어의 말처럼, “개체는 개체 자신인 동시에 곧 인류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어떠한 순간에도 지당하다.[…] 어떠한 개체도 인류의 역사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인류 역시 어떠한 개체의 역사에도 무관심할 수 없다.” 만약 개체가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개체가 모여 이룬 하나의 사회 역시 개체에서 파생되어 종합된 역사를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소사를 경유해 사회와 시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으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실제로 개인과 사회, 소시민의 인생과 도시의 거대 내러티브를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 플롯짜기에 공을 많이 들였다. 그러나 줄거리를 끌고 나가는 한 명의 주인공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역설적으로 그의 삶의 터전인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빠져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그 이유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노인이 한창 사회생활을 할 시기가 두 다리를 교통수단 대신으로 여겨야 했던 시대이기 때문인데, 이는 곧 그가 속한 작은 지역사회 밖으로 활동 영역이 더 넓어지지 못하는 물리적인 한계가 존재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야기의 회자가 뚜렷한 정치적 성향을 보이거나, 동시대의 양상들을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맞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도 애니메이션에 시대상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 개인의 동선이 전체 도시의 점들에 미치지 않아서 플롯에 포함되지 못한 지역의 면면들을 어떻게 작업으로 보여줄 것인지가 작가가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무인극단 워크맨> 프로젝트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작업은 지역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애니메이션을 상영하는 방식이다. 이는 전체 전시가 구성되는 방향성과도 연결된다. 작가는 작업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프로젝션 매핑( Projection Mapping) 을 택했다.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모니터와 노인과 관객을 과거로 데려가는 시간의 문인 워크맨을 형상화한 육면체와 조형물, 분활된 두 영역에 디지털 이미지가 하나의 프레임으로 영사된다. 한 장 한 장 손으로 원화를 그려 프레임을 이어나가는 애니메이션의 아날로그적 공정이 시간을 과거로 떠나 보내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순간에 도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작가는, 여기에 21세기 이후 확장되고 있는 미디어 아트의 표현기법을 덧입힘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공간 안에 묶어 세계의 순환성을 표현하려고 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작품이 보여주는 순환성은 작가가 이질적인 두 매체에 부여한 시간성의 교차점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어 보인다. 작가가 손으로 회고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곧-작가의 것이기도 하고 노인의 것이기도 한- 몸을 매개로 삶의 기억을 반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무라고 할 수 있을 백지에 노인의 몸이 새겨지면서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프레임마다 분절되었던 몸이 연결되어 운동을 만들어내면서 세계가 전개된다. 그러므로 그 세계를 예술적 조형언어로 실체화하는 작가의 손/몸은 노인의 몸에 쌓인 기억을 다시 불러내고, 과거에 속해 있던 사건/몸이 지금 시간에 출현해 존재는 순환한다.
<무인극단 워크맨> 프로젝트를 지켜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지역성의 담지와 예술적 작업 언어의 ‘균형’이었다. 지역성에 관심을 두는 작업들이 흔히 범하는 잘못이 지역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수집하는 것에 집중해서 결과물의 예술적 완성도를 놓치거나, 반대로 자신의 작업 언어에 천착해 말하고자 하는 지역의 실체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김혜련은 안양이라는 경계가 뚜렷한 영역 안에서 수년간 직접 쌓아온 도시의 정보를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도시 혹은 지역이라는 추상적 집단이 미처 드러내지 못하는 개인의 이야기를 작업의 내용에 녹여내었다. 그리고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개인사의 구술 채록을 원화와 애니메이션, 역동적인 프로젝션 매핑, 그리고 영상에 맞추어 제작한 음악, 메이킹 필름을 결합한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시각적으로도 즐길 거리가 풍부한 전시를 보여주었다.